[우물 안 개구리 허니업의 영화 이야기]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1984)
※ 이 글은 해당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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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 및 오탈자 등 문제가 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댓글 남겨주시면 바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 이 글은 필자 본인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견해에 따라 서술한 것이므로, 작가의 원래 의도와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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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오지 않는 밤에는 이 영화를 감상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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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계곡의 나우시카 (1984)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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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출처] |
최근들어 불규칙한 생활패턴 때문에 며칠 째 낮밤이 바뀐 채로 생활하고 있다. 잉여로운 내 모습에 죄책감이 느껴져서 침대에 누워 억지로 잠을 청해봤지만 시끄러운 머릿속을 도저히 진정시킬 수가 없어 한참을 뒤척이던 어느 날, '이렇게 의미없이 뜬 눈으로 밤을 새느니 차라리 영화라도 한 편 보는 것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참으로 웃긴 게, 분명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살 때는 (최소한 영화에 있어서만큼은) 편식이라는 걸 모르던 스타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시간이 넘쳐나니 딱히 끌리는 영화가 없었다. 하릴없이 위시리스트를 넘기다가 결국 '가볍게 애니메이션 영화나 한 편 보자'는 생각으로 고른 작품이 바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였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스튜디오 지브리, 정주행의 시작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모체인 '톱크래프트'라는 애니메이션 업체에서 제작했다. [캡처] |
스튜디오 지브리는 1985년 일본의 애니메이션 거장인 미야자키 하야오와 타카하타 이사오가 만든 애니메이션 제작업체다. 사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만들어진 작품은 아니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스튜디오 지브리를 설립하기 직전인 1984년, 일본의 아니메 전문 잡지 <아니마주>에 연재 중이던 동명의 원작을 바탕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아시아에서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고있는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기에 나 역시도 이미 어렸을 때부터 「이웃집 토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 그의 작품을 다수 접한 세대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에 '자연주의' '페미니즘' '반전(反戰)' 등 투철한 시대정신이 담겨있다는 사실에 대해 알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그의 작품을 찬양하다시피하는 수 많은 평론들과 팬덤을 접하면서, 기회가 된다면 그의 작품을 정말 진지하게 감상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쭈욱 해오고 있었던 터였다. 물론, 그의 작품들을 모두 정복하고나면 나 역시 그의 팬덤에 편승하게 될 것인지 호기심 아닌 호기심도 느끼고 있었다.
거신병과 핵폭탄
거신병이 만들어 낸 폭발이 원자폭탄의 버섯구름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있는 건 과연 우연의 일치인 것일까? [캡처] |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이던 1945년 8월,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다. 일본 본토에 투하된 두 발의 원자폭탄으로 약 10만명 정도가 즉사했으며, 이후로도 해가 넘어가기 전까지 약 20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추가로 사망했다. 각각 '리틀보이'와 '팻맨'이라 이름 지어진 두 발의 원자폭탄은 인류 역사 상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민간인 학살을 위해 사용된 핵폭탄'이었다. 영화에는 약 천 년 전, '불의 7일' 동안 지구의 모든 생명체를 태워버린 '거신병'이라는 괴물이 등장하는데, 토르메키아라는 왕국은 지구정복을 위해 거신병을 부활시키려 한다. 거신병이 과거 지구를 초토화시켜버리는 바람에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모두가 고통받고 있음에도, 그런 거신병을 다시 부활시키려는 토르메키아를 보고있노라면 분노를 넘어 한심함 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토르메키아의 어리석고 모순적인 행태는 영화 밖 현실에서도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다. 핵폭탄의 비극을 이미 뼈아프게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나라들이 전쟁억지라는 명분 아래 핵무기의 개발과 생산에 열광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단지 효율이 좋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력 생산의 상당 부분을 원자력 발전에 의존하고 있다. 물론 감독이 거신병을 통해 핵에 대한 경고 메시지를 표현하려고 했건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30여 년 뒤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을지 심히 궁금했다.
자연(自然)은 언제나 옳다
작품 속에서 지구는 유독한 물질(장기)을 연신 뿜어대는 '부해(腐海)'라는 독균으로 가득 덮여있고, 설상가상으로 부해의 숲이 날이 갈 수록 커져감에 따라 사람들은 점점 인류의 종말에 대해서 걱정하게 된다. 그런데 주인공 나우시카는 부해 역시 깨끗한 흙과 물이 있으면 장기를 내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사로고 부해의 서식지 중심(지하)으로 떨어지게 되면서 부해가 오히려 오염된 지구를 정화시켜 흙과 물을 깨끗이하고 있다는 비밀도 알게 된다. 이렇듯 부해는 장기라는 유독 물질을 끊임없이 발산하면서도 동시에 오염된 흙과 물을 깨끗이 정화시켜주기도 하는데, 부해가 갖는 이러한 양면성이 실제 자연의 모습과 상당히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악취가 나는 강에 둑을 쌓아 직류화하고 수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댐과 보를 건설하지만, 이로 인해 강의 정화작용이 퇴화되고 여름철이면 녹조피해가 만연한다. 병충해와 각종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 논과 밭에 약을 치고 인간을 포함한 여러 동물들에게 각종 항생제를 투여하지만, 이내 생태계가 교란되고 또다른 질병과 알러지들에 위협을 받는다. 자연이라는 단어가 '스스로(自)'의 의미를 갖는 단어와 '그러하다(然)'의 의미를 갖는 단어가 결합되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한 번쯤 진지하게 고찰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메시아(예언자)와 나우시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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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막바지에 이르러 주인공인 나우시카는 성난 오무들에 치여 죽게 되는데, '만약 나우시카가 죽지 않았더라면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녀가 손쉽게 화난 오무들을 진정시키고 어리석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자연주의적 가치관'이 너무 가볍게 느껴지지는 않았을까. 나아가 '과연 나우시카가 다시 살아나지 못 하고 죽은 채로 끝이 났다면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하는 의문도 들었는데, 그랬더라면 반대로 '자연주의적 가치관'이 다소 비관적으로 느껴졌을 수도 있겠다. 기독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에는 메시아(예언자)가 등장하는데, 대부분의 메시아는 환생을 통해 인간 삶을 초월한다. 메시아의 환생은 그들의 존엄적 가치를 부각시키는 역할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들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희망과 믿음을 통해 극복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인간은 고도의 과학기술 덕분에 수 많은 자연재해들을 극복할 힘을 가졌지만, 동시에 전혀 예상치 못한 또다른 재앙들에 위협받고 있듯이, 인간과 자연의 공생은 마치 인간이 죽음을 거스를 수 없는 것 처럼 불가능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예수를 포함한 여러 메시아들이 희망과 믿음을 통해 죽음을 초월하고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삶을 이룰 수 있다고 설파했던 것과 같이, 인간과 자연도 조화롭게 공생할 수 있다는 희망과 믿음이 필요할 뿐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공생이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되겠다.
크리스토퍼 놀란과 한스 치머,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와 히사이시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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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가 히사이시 조 [출처] |
크리스토퍼 놀런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바로 작곡가 한스 치머다. 한스 치머는 수 많은 영화 감독들의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가 작업에 참여한 작품들은 대부분 흥행에 성공했다. (개인적으로는 그가 작곡한 수많은 영화 음악들 중에서도 「캐리비안의 해적」 삽입곡인 《He's a Pirate》가 최고라고 생각한다) 「인셉션」 「다크나이트」 「맨오브스틸」 「인터스텔라」 등의 작품에서는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과 같이 작업을 했다. 많은 사람들은 크리스토퍼 놀란이 당대 최고의 영화감독으로 손꼽히게 된 데에는 한스 치머가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크리스토퍼 놀런에게 한스 치머가 있다면, 미야자키 하야오에게는 히사이시 조가 있다. 히사이시 조 역시 흥행에 성공한 수많은 영화들의 삽입곡을 제작했는데,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는 「이웃집 토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을 포함한 대부분의 작품에서 작업을 함께했다. (역시 최고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 주제곡인 《Marry-go-round of Life》가 아닐까 싶다) 한스 짐머와 히사이시 조의 음악들은 효과음이나 삽입곡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어떻게 보면 영화의 한 부분으로 인식되던 영화 음악을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 개척한 인물들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물론 이 작품 역시 영상과 음악의 조화가 뛰어나다. 하지만 나우시카가 부해의 숲 속에 떨어져 의식을 잃고 쓰러진 장면과 오무의 무리에 치여 죽은 뒤 다시 살아나는 장면에서 같은 곡이 나오는데, 같은 곡이 삽입된 이 두 장면이 어떤 의미를 갖는 건지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이 글을 읽으신 분들의 개인적인 생각을 부탁드립니다)
단순함의 미학, 미니멀리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엔딩씬 [캡처] |
사실 이 영화는 등장인물도 많지 않고 스토리도 그리 복잡하지 않다. 결말에 가서도 (최근 유행하고 있는) 반전코드 따위는 전혀 들어가있지 않다. 오히려 영화 초반 부터 나우시카가 바로 전설 속 주인공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으며, 나아가 나우시카가 환생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화해를 유도한다는 설정은 다소 진부하기까지 하다. 심지어는 색감 조차 전혀 화려하지 않다. 하지만 오히려 기본에 충실했다는 느낌을 더 많이 준다. 굳이 「겨울 왕국」과 비교해보자면, 「겨울 왕국」이 화려한 영상미와 풍성한 사운드 그리고 동화같은 소재를 통해 동심을 자극하는 작품이었다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영상미도 화려하지 않고 사운드도 그리 웅장하지는 않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두 작품 모두 연령대를 불문하고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특히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관객의 연령과 환경에 따라 감상이 모두 다를 수도 있다는 점이 매력적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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